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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거대여당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54년 5·20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자유당이다. 1951년 말 이승만이 원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추진을 위해 결성된 자유당은 같은 이름의 두 개 당이 며칠 상관으로 만들어지는 등 초기에는 계파 투쟁이 치열했지만, 1954년 초 이범석이 축출되고 이기붕이 총무부장으로 당을 운영하면서 이승만 총재의 완전한 소유물이 되었다. 첫 총선에서 203석 중 114석을 획득하고 무소속 의원들을 포섭해 137석에 이른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으나 4·19 혁명으로 이승만과 함께 퇴장했다.
자유당에 이어 독재의 도구로 만들어진 거대여당이 박정희의 공화당이었다. 군사반란 세력이 준비해 두었다가 1963년 초 정치 활동 재개가 허용되자마자 창당을 선포한 공화당은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기능이 확대된 현대적 정당을 지향했다. 그 결과 정책 개발과 원외 활동을 확장하는 효과를 얼마간 이루기도 했지만, 독재정권 유지라는 기본 임무에 파묻혀 권위주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1973년 유신체제에 접어들자 그 나마의 정당 기능도 퇴행해 버리고 완벽한 거수기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80년 10월 해산된 공화당의 뒤를 이은 것이 전두환의 민정당이었다. 민정당은 공화당의 인적 자원뿐만 아니라 물적 자원도 넘겨받았다. 당시의 정당법에는 해산된 정당의 재산이 "당해 정당과 유사한 목적을 가진 정당이나 단체에 기부하거나 기타 다른 처분 등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민정당은 더도 덜도 아닌 공화당의 후신이었지만 전두환에게 불편한 유산을 배제하기 위해 간판을 바꿔단 것이었다.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은 모두 독재자의 사유물로서 독재의 도구였다. 물론 모두 당시 한국의 최대 정당인만큼 독재자의 졸개에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정치다운 정치를 위해 참여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독재자의 의지를 거스르는 행보는 있을 수 없는 철저한 권위주의 정당이었다.
1987년 이후 선거다운 선거가 시작되면서 독재자의 사유물로서 거대여당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래서 권력의 독점이 아닌 과점 체제로 전환한 것이 1990년 초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이었다. 민자당은 여러 계파의 협력과 경쟁 속에 정치조직으로서의 기능이 활성화되었지만, 기본 틀은 민정당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권력의 그늘에서 검은 정치 자금에 의존하는 행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권력 과점 체제로서 민자당의 구조는 1995년 말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7년 말 한나라당으로 다시 바꿀 때까지 계속되었다.
위 칼럼은 1997년 말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시점에서 쓴 것이다. 국회에서는 제1당이지만 야당이 됨으로써 한나라당을 덮어주던 권력의 그늘이 크게 줄어들게 된 시점이었다. 그로부터 11년, 한 때 제2당으로 물러서기까지 했던 한나라당이 다시 거대여당의 자리로 돌아왔다.
1963년 이래 35년간 권력의 그늘에서만 서식해 온 거대여당의 전통을 잃어버린 한나라당이 10년간의 야당 행로를 견뎌내고 원래의 자리를 되찾은 것은 장한 일이다.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건전한 발전을 모색해 온 노력 또한 적지 않음을 흔쾌히 인정한다. 신한국당 시절과 비교하면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경륜과 실력을 가진 인물이 비중을 크게 늘렸다.
이런 변화를 놓고 본다면 한나라당은 신한국당 이전의 거대여당에 비해 당연히 더 뛰어난 정치력을 기대할 만한 정당이다. 가치관에 있어서야 표방하는 '보수'를 벗어나 진보적 개혁에 앞장설 것을 바랄 일이 아니지만, 정책을 개발하고 국회를 운영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21세기 정당다운 모습을 얼마간이라도 보여줄 위치에 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한나라당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입법 전쟁'에 내몰려 내용도 모르는 법안을 통과시키느라 최소한의 체면도 지키지 못하고, 용산 참사에 대한 민심을 조금이라도 살펴보자는 동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역사상 최고로 화려한 '비리 백화점'으로 인정받는 통일부 장관 후보를 감싸주기에 바쁘다.
왜 이럴까? 한나라당이 밉기보다 불쌍하다.
서슬 푸른 박정희 아래 공화당에서도 몇 차례 '항명' 사태가 있었다. 지금 뒤져보니 1965년의 인사 항명 파동, 1969년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사태,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결의안 사태 등이 있었다. 한나라당 있는 사람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명박 집단이 회귀하고자 하는 목표가 어느 시절인가를. 경제개발이라도 하던 60년대가 아니라 이권 나눠먹기만 하던 50년대 자유당 시절이란 것을.
/문천(시민광장 필명),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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