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시민 선생님"
1. 스물여섯
작은 창문하나 있던 고시원, 햇살 좋은 날 창문 틈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 그것은 날 위한 햇살은 아니었다.
부산에서 살던 나는 대학입학과 동시에 상경했다. 취업준비를 하던 시기까지 적어도 월세는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월세까지 감당하긴 힘들었다. 집은 갈수록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 되었지만, 부모님께서는 나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월세 걱정은 하지 말라 하셨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둔 나는 평범한 취업준비생이었다. 공대를 나왔지만 전공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학생활을 만끽하다 보니 전공뿐 아니라 다른 흥미로운 수업을 찾지도 않았다. 남들만큼의 학점, 노력, 성과 정도를 가지고 있었다. 남들보다 뛰어난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다만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던 점은 정치, 사회에 대한 관심과 지적호기심이 남들보다 많았고 그런 토론에 대한 갈증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은 그런 것들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지금 시기에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 하는 듯 했다. 나의 갈증은 고향인 부산에서 중학교 친구들을 만났을 때와,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서만 조금 해소 할 수 있었다. 그런 갈증도 평범한 취업준비생에겐 사치였다. 강남의 한 고시원에서 그렇게 남들과 같이, 아니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책이 너무 좋다며 택배로 책 한권을 보내주셨다. 유시민 선생님의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집에서 빈둥거리던 어느 주말저녁 오랜만에 책장을 폈다.
2. 열다섯 첫 번째
사람에게 발현되진 않아도 혹은 천부적인 재능까진 아니어도 성장가능성이 있는 재능 하나쯤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이 글쓰기였다고 믿는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독후감은 나를 항상 괴롭혔다. 무엇보다 독후감을 써야하는 책들은 정해져 있었고, 그런 책들은 재미가 없었다. 어느 날, 반에서 학급대표로 나갈 독후감을 뽑는다고 했다. 당연히 관심이 없었다. 재미없는 책은 읽지 않았다. 하지만 제출은 의무였기에 줄거리와 내용파악만 하고 썼는데 학급 대표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엔 학교 대표를 뽑기 위해 학급에서 나만 독후감을 한편 더 쓰게 되었다. 역시 재미없는 책에는 관심이 없었고 읽지 않았다. 당시에는 성격도 내성적이라 대충 쓰고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들보다 잘난 것도 없는데 튀어 보이는게 싫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 대표가 되었다. 대체 잘 쓴 독후감의 기준이 뭔지 궁금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학교 대표로 나간 독후감의 결과는 돌아오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백일장, 독후감, 학교에서 학기에 한 번씩 발간하는 학교지에는 내 글이 거의 빠지지 않고 실렸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익명으로 학교 게시판에 모든 학교 선생님들의 특징, 별명, 행동을 분석해 유머러스하게 쓴 장문의 글이 학생뿐만 아니라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누가 쓴 글이냐며 꽤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다. 가장 친한 친구 외에는 아직도 그 글을 쓴 사람이 나인걸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글쓰기를 할 때만 남들보다 조금 돋보였고 좋은 점수, 칭찬을 들었다. 입시준비를 시작 하면서 재수, 대학시절을 거치며 나는 강제적으로나마 가졌던 글쓰기 시간을 갖지 않게 되었고, 그저 놀기 바빴다.
그로부터 10년 후 취직준비를 하며 오랜만에 자신 있게 열심히 써본 자기소개서는 형편없다는 첨삭가의 지적을 받았다. 애초에 나에게 그런 재능같은건 아마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내가 남들보다 돋보였던 유일한 것이 글쓰기였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3. 열다섯 두 번째
사춘기 가치관을 형성하는 다양한 요인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환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때 나도 잘 알지 못하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비방하는 글, 이상한 포스터에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나보다도 한 참 어린 중, 고등학생이 많다는 사실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접근이 용이하고 접속이 가능한 일베는 당시 사춘기의 중, 고등학생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접하게 된 자극적인, 극우적 글이 그들의 백지상태의 가치관에 다른 많은 좋은 것 보다 먼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또래집단에서 가십거리가 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그때는 소속감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시점은 다르지만 그들이 일베라는 곳에 자의적, 타의적으로 노출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사춘기시기에 나는 신해철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 유시민 선생님을 알게 된 것 만큼이나 나에게 행운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방학만 되면 나는 새벽 4~5시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키가 크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우연히 새벽 2~4시에 듣게 된 신해철님이 진행한 라디오는 내 사춘기 가치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줬다. 개학 이후에는 녹음해서, 라디오가 종영한 후에는 개인 라디오 방송국을 찾아 들었다. 자극적인 얘기도 있었고 쓸데없는 얘기도 많았지만 신해철님은 주변 어른들이 통상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항상 왜? 라고 물었다. “왜 고3은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참으며 공부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거지?” “왜 공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의견을 말 하면 안 되는 거지?” 라며 주변 어른들이 당연하다고 하는 말과는 달랐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흔히 비정상을 정상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그랬으니 너도 그래야해” “그 시절엔 다 그렇게 하는 거야” 나는 이런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도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 또한 이해는 된다. 현재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유시민 선생님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열다섯, 나는 근거 없이 사람들이 ‘그래야해’라는 것에 왜?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남들에게 내 의견 말하고, 설득하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4. 일곱
일주일에 한번 저녁에 엄마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한 시간정도 간다. 낯선 어두운 골목을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둥글게 모여 앉아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른다. 가요는 아니었다. 내가 엄마손을 잡고 매 주 가던 그 곳은 ‘여성회(여성노동회)’였다.
지금도 나는 그곳이 뭐하는 곳인지 잘 모른다. 어머니한테 구체적으로 물어 본 적도 없다. 일곱 살에 들었던 그곳에서의 이야기들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후에 어머니와 내가 TV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당시 나를 귀여워해 주었던 구성애 아줌마가 TV에 나왔다. 아는 사람이 나와서 마냥 신기했다. 어머니는 지금은 연락은 안하지만 아직도 언니라 부른다. 나 또한 당연히 기억한다. 그 때도 존재감이 컸던 모양이다.
내 태명은 ‘통일’ 이다. 지금도 부모님과 이모들은 나를 통일이라고 부른다. 부모님 소망이셨다고 한다. 그리고 구성애 아줌마의 아들은 ‘광복’이다. 물론 광복후에 낳은 아들이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의 소망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그곳에 나는 몇 년 동안 엄마 손을 잡고 다녔다. 어머니께 왜 언젠가부터 안 갔냐고 물어보니 각종 시민단체들이 연합이 되고 본인 생계도 바빠 안가셨다고 한다. 나는 요즘말로 무슨 말인지 1도(하나도) 모르고 그분들의 노래와 토론을 몇 년 동안이나 매주 들었다.
지금 느끼는 나의 정치, 사회적 토론에 대한 지적 호기심의 씨앗이 그때 무의식중에 심어졌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5. 부모님
"가발 쓴 대머리는 물러가라" 양김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되던 당시 부산에서는 학생운동이 많았다고 한다. 임신 중이었던 어머니는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최루탄을 많이 마셔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니가 머리가 좋지 않은 이유는 모유보다 최루탄 가스를 먼저마신 탓이라며 지금도 나를 위로하신다.
우리집안, 특히 외가 쪽은 특이하게 부산에 있으면서도 민주당을 열렬히 지지했다. 김대중 대통령님이 당선되던 날 개표방송을 보다 늦은 시각 김대중 대통령님이 이회창 후보를 역전했을 때 10살의 나이로 할아버지께 직접 전화해 “할아버지 김대중이 역전 했어요!”라며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내가 왜 기뻐했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2학년 때 이모들과 엄마가 콘서트라며 데려간 곳이 노사모였다. 부모님은 노사모 회원은 아니었다. 열렬한 노사모였던 이모부가 선봉장이었고, 엄마와 이모들은 지지자였다. 나는 그 당시 노무현대통령님도, 16대 대선의 드라마 같은 과정도 잘 알지 못했다. 후에 책과 ‘노무현입니다’라는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때를 느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모부는 사업에 실패하며 노무현정부를 후보시절만큼 지지하지 않았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꼭 당선되어야 한다며 30년 군인생활을 하신, 누구보다 당당하셨던 할아버지께선 18대 대선 당시 치매를 앓고 있었다. 엄마와 이모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동네사람들이 1번을 찍으라 해서 1번을 찍으려 한다고 하셨다. 엄마와 이모들이 우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첫 투표권을 가졌고 공부에서 해방된 20대, 서울시장 이명박 후보의 적수가 없던 17대 대선부터 내 관심도 무뎌졌다.
6. 서른
2017년 현재 나는 서른 살이다. 나름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곳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
스무살에 유시민 선생님을 알았더라면 내가 업으로 하는 일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주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이 가는대로 20대를 살아가다보니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선택지는 제한적이었다. 아쉽지만 내 탓이다.
내 삶은 늦은 스물여섯, 부모님이 보내준 유시민 선생님의 ‘어떻게 살 것인가’의 책장을 폈던 그날 저녁부터 바뀌었다. 게임을 하던 시간에 책을 읽게 되었다. 피씨방에 가던 시간에 서점에 가게 되었다. 아무것도 안 들어있던 가방엔 항상 책이 들어있고, 아직 실천이 쉽지 않지만 작은 수첩에 매일 글을 써보기 시작했다. 내 인생은 그때부터 조금씩 풍요로워 지기 시작했다.
먼저 유시민 선생님의 책들을 전부 사서 무작정 읽었다. 책읽기에 능숙하지 못하기에 다른 책과 병행할 수는 없었다. 이 후 다른 책들도 읽었다. 선생님이 추천하신 책 위주로 읽었다. 내가 선생님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이유이다. 취직을 한 후 주말에는 억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만 읽었다. 다른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내 자신이 바뀌고 싶었다. 변하고 싶었다. 선생님을 스물에 알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마흔이 아닌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내안의 숨어있던 무언가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의식중에 뇌리에 박혔던 사고, 경험, 재능이라 느꼈던 것, 갈망했던 것들, 갈증으로 남아 무의식중에 흩어져있던 내안의 조각들이 선생님의 글을 통해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었다. 퍼즐을 통해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흐릿하게나마 설계해 보기 시작했다.
유시민 선생님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했는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알려주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내가 무의식중에 내게 있었다고 믿는 재능(글쓰기), 가치관, 정치, 사회에 대한 지적호기심을 너무 완벽하게 가지고 계신 분이 유시민 선생님이다. 지식의 차이를 떠나 타 지식인들보다 유시민 선생님을 유독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건 그런 면에서 선생님과 나와의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고 풀지 못한 의문들이 많이 있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여전히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유시민 선생님을 통해 나를 찾을 수 있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을 고민해 볼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평생 선생님의 지식만큼은 못 가지더라도, 세상에 기억될 훌륭한 사람은 못되더라도 좋은 사람, 세상에 조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유시민 선생님을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삶도 이전의 삶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 덕분에 좋은 삶을 살아 볼 기회가 생겼다. 조금 더 가까이 알고 싶어 시민광장에도 가입했다. 한번 꼭 뵙고 싶다. 만나면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좋다. 선생님의 생각과 가르침은 책을 통해서도 아직 다 배우지 못했고, 앞으로도 다 배우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런 것은 지금처럼 책을 통해 대화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이 말은 꼭 직접 선생님께 하고 싶다.
지금 나는 서울의 한 원룸에서 살고 있다. 창문이 큰 탓에 블라인드를 설치했다. 햇살 좋은 주말 집에서 책을 읽을 때, 블라인드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그 햇살은 날 위한 햇살이었다. 취직을 했기 때문도, 고시원보다 집이 크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오래 살진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누군가 내 삶의 선생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유시민 선생님이라고 답할 것이다.
처음에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글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담고 싶은 내용이 더 많았지만 이것도 제 나름대로.. 많이 줄이고, 뺐습니다...
길게 쓴 글은 좋지 않다는데 읽는데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홈페이지 텍스트 보다는 첨부파일이 조금 더 읽기 좋은 것같습니다.
긴 글 읽어 주신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글을 쓰며 다시 한번 제가 어떻게 살았나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좋은 글들과 함께 시민광장 회원님들과 선생님에게 제가 쓴 글이 보여지게 되된다니 부끄럽지만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들, 좋은 말씀들 새겨 들으며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